인천아트플랫폼 기획전시
[외연과 심연 (Denotation and Profundity)]
2023.6.8-8.15
다음은 이 열차의 종착역인 피클드 씨티, 피클드 씨티입니다.
도심 한복판에 설치된 거대한 전광판에 가득 담긴 파도가 실재처럼 몰아칠 때, 사람들은 모두 그것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한동안 국내외 언론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 대형 수조 속 에서 넘실거리는 파도가 일으키는 포말에 찬사를 보냈고, 이상한 기시감이 들었다. 뤼미에르 형제가 만든 최초의 영화 〈열차의 도착〉(1896)이 처음 영화관에서 상영되었을 때, 겪어본 적 이 없는 그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저 멀리서 열차가 들어오는 모습을 촬영한 1분이 채 되지 않는 이 단순한 영상을 본 몇몇 사람들은 스크린 너머로 움직이는 열차가 자신에게 충돌할까 봐 겁을 먹고 그대로 뛰쳐나갔다고 하니, 이 기시감의 출처는 아마도 이미지의 가능성과 현실 성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실재감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었을까.
2D에서 3D로의 전환 이후 실재감이 의미하는 것은 단순한 사실적 재현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대상과의 유사성 같은 문제가 아니다. ‘어딘가 존재하는 듯한 느낌’이라는 애매한 정의를 가진 이 단어는 팬데믹 이후 실제와 가상의 경계가 사라지면서 더욱 두드러졌다. 이는 시공간의 물 리적 한계가 사라지면서 발생하는 일종의 거리감의 축소이자 그와 동시에 경험하게 되는 어떤 현상학적 감각의 체험일 것이다. 이는 당연히 포스트디지털 세대에게 가장 익숙한 언어인 미 디어를 통해 제공되고, 유통되고, 흡수된다. 모션 그래픽, 프로젝션 맵핑, 3D 모델링 등 기술 집약적인 동시대 미디어아트의 쟁점은 ‘이머시브’라고 할 정도로 관객의 감각적 체험에 집중 한다. 영사된 스크린 안에 관객이 그대로 침투하도록 하여, 최대의 몰입감을 불러일으킨다. 이 는 가상이라는 것을 내가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상공간에서 느끼는 나의 감각은 실재 이기 때문에 가능해진다. 그 안에서 느끼는 실재감이 퍽 신비롭고, 꽤나 예술적인 체험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나치게 기술에 집중한 미디어아트는 파도의 포말만큼이나 금 방 사라지기 마련이다. 인간은 새로운 기술에 언제나 빠른 속도로 적응하고, 현실 이상의 감 각적 체험에도 어느새 익숙해져버려서 내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아무도 스크린 너머로 움직이는 열차에 놀라서 도망가지 않듯이.
얄루의 작업이 그저 감각적인 차원에 머무르지 않는 이유는 그 내부를 채우는 작가의 상상력 과 그것의 기반을 이루는 여러 문화적 정체성이 작업 안에 혼재해 있기 때문이다. 허구의 세 계를 직조하는 얄루는 스토리텔러이자 일종의 가상 세계의 설계자 역할을 맡고 있다. 얄루가 그리는 가상 세계는 저 깊은 심해, 우주처럼 몽환적인 바다 깊숙한 어느 곳을 무대로 한다. 그만큼 우리에게 알려진 것이 별로 없는 미지의 영역인 심연과 같은 심해를 배경으로,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로 안내한다. 바다 속 숨겨진 아틀란티스처럼 인류의 역사가 먼지처럼 빼곡하게 쌓인 얄루가 만들어낸 이곳은 과거 인간이었던, 혹은 인류의 마지막 장면이었던 무언가를 암 시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미래가 어떤 결말일지, 작가는 그에 대한 결론을 유보하고 있지만 그가 제시하는 허구 세계의 주인공이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얄루가 보여주는 세계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와 유사하지만 인간이 중심에 있지 않다는 점에서 어쩌면 윤리적 고려의 범위가 인간 너머로 더욱 확장된 세계일지도 모른다.
넷플릭스의 〈블랙 미러〉 시리즈(2011-2016)나 〈이어즈&이어즈〉(2019), 〈러브, 데스+로봇〉 (2019) 등 근 미래의 어느 시점을 그린 듯한 SF 시리즈들은 모두 하나같이 나름의 절망을 보 여준다. 과거의 여느 SF 소설이나 영화가 그랬듯이, 오래된 상상이 제시하는 미래 도시는 언제나 여러 언어가 혼재된 아시아의 뒷골목처럼 그려지며 우울한 도시의 퇴폐적인 모습에서 시 작하지만 최근 SF 시리즈들은 그런 까마득한 미래를 상정하지 않는다. 과거의 상상은 여전히 가능성으로 남아 현실성으로 대체되지 못했고, 다행스럽게도 디스토피아는 챗GPT 보다 앞서 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SF는 오히려 현실에서 실현 가능한 범위 안에서 일어 나는 기술의 변화가 삶 속에 침투해 서서히 바뀌는 재난을 그린다. 여전히 기술 발전의 미래 가 가져오는 멋진 신세계는 없다.
얄루가 그리는 미래는 어떤가. 그것을 과연 미래라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아틀란티스처럼 우리가 알 수 없는 더 오래된 과거는 아닐까? 혹은 더 먼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발굴한 과거 일지도 모르는 이 세계를 선형적 시간에 위치시키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경탄과 기괴함이 뒤섞인 심해 생명체의 또 다른 우주가 현실 속의 여러 문화와 혼재되어 나타나는 이 세계에서 작가가 말하고자하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확실히 얄루는 자신이 상상하는 세계에 새로운 내러티브를 새겨 넣음으로써 인간 이외의 존재 를 위한 세상으로 넘어간다. 〈피클드 씨티(Pickled City)〉(2022)와 〈호모 폴리넬라(Homo Paulinella)〉(2020)가 그렇다. 그리고 여러 문화, 역사, 지역, 기후, 생물 등이 뒤섞여 형성된 〈미역 정원(Garden of Seaweed)〉(2019)과 〈미역국(Seaweed Soup)〉(2019), 그리고 〈생일 정원(Birthday Garden)〉(2020)이 있다. 출산을 무사히 끝낸 산모에게 일종의 세레모니처럼 미역국을 챙겨주고, 생일이 되면 항상 미역국을 챙겨먹는 한국 사람에게 미역이 가진 민속적, 문화적 요소와 미끄럽고 끈적이고, 어둡고 질척이는 해조류에 대한 서양의 대비되는 시각 속 에서 얄루는 이 정원의 안내자이다. 자연스럽게 출산과 모성, 엄마의 이미지를 미역국이라는 음식에 가득담은 한국의 정서가 K-팝, K-뷰티, K-드라마라는 이름으로 수출되는 한국대중문 화와 겹쳐진다. 한국에서 만들어진 모든 컨텐츠에 ‘K-'가 붙음으로서 완성되는 이 이상한 현 상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얄루의 생일 정원에서 춤추는 미역들은 모두 K-팝 아이 돌의 모습을 닮아 있다.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예스! 세범 마스크(Yes! Sebum Mask)〉 (2018)는 ’노세범‘이 유행하던 K-뷰티의 어느 시절에, 끈적임 없이 매끄럽고 보송보송한 피부 연출을 위해 K-뷰티의 영역에서 거의 영구 퇴출을 선고받다시피 한 피지를 주인공으로 내세 웠다.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의 마스크 시트가 모션 캡쳐로 둥실둥실 떠다니고, 이는 결국 미역 요정들과 만난다.
다른 한편 지구의 역사, 인류의 모든 기억이 축적된 신체로서 호모 폴리넬라는 과거 인간이었 던 것으로, 일종의 진화에 진화를 거듭한 인간의 미래이다.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신체 그 자체만을 지닌 생명체가 된다. 지구 온난화와 기후 위기, 해수면 상승과 바이러스 등의 각 종 재앙으로부터 생명체 자체가 살아남기 위한 적자생존의 결과가 호모 폴리넬라이다. 탈인간 의 미래 생명체는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가 뒤섞이면서 탄생한다. 그리고 비로소 인간중심주의 의 종말을 고지한다. 과학과 인문학적 접근을 통해 형성된 얄루의 피클드 씨티는 심해어처럼 자체적으로 빛을 내는 생물발광에서 비롯된 도시이다. 민속 신화의 서천 꽃밭과 백제금동대향 로에서 모티프를 얻은 피클드 씨티는 오로지 생명체 자체만을 위한 도시, 역사적, 문화적 정 체성이 중첩된 포스트휴먼을 위해 만들어진 가상 세계이다. 이 곳을 관장하는 꽃감관으로써 얄루의 역할은 호모 폴리넬라가 무럭무럭 자라도록 도와주는 관리자이자 안내인이다.
얄루가 그리는 세계에 인간을 위한 자리는 없다. 그렇지만 이 역시도 어쩌면 한 인간의 상상 에 불과하기에, 완전한 탈인간중심주의는 인간에게서는 결코 나타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포스트휴먼의 미래는 분명 얄루가 제안하듯이, 모든 것이 뒤섞인 생명의 역 동성으로 가득 찬 곳일 것이다. 의식도 무의식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 자연과 기계, 생물과 미생물, 인간과 인간 이외의 모든 생명체가 공존을 이루며 사는 세계가 어떤 결말일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얄루의 피클드 씨티와 호모 폴리넬라는 조용히 다가오는 인류의 종말이자 생명체 의 승리일지도 모른다. 얄루가 만들어낸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최종 승리자인 호모 폴리넬라와 인류세의 마지막 종착역인 피클드 씨티. 이곳의 안내자는 이렇게 말한다.
“다음은 이 열차의 종착역인 피클드 씨티, 피클드 씨티입니다. 내리실 곳은 없습니다.”
글 ㅣ 이슬비
As part of Incheon Young Artists' Exhibition Installation funded and supported by incheonartplatform
Credit:
Original sound: Yetsubyy
Video animation assistant: Hamin Song
Scenography advisor: Juha Lee
documentation: Incehon Art Platform